분류 전체보기23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소수자 연대, 물의 상징, 스트릭랜드)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을 '괴물 영화 감독'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 판의 미로를 친구과 함께 보다가 손에 눈이 달린 페일 맨이 나오는 장면에서 기겁해서 중간에 몇 번이고 소름이 돋은 기억이 있거든요. 그 트라우마 때문에 셰이프 오브 워터도 한참 미루다가 결국 보게 됐는데, 전혀 다른 종류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건 단순한 괴물 영화가 아니었습니다.소수자 연대가 만들어낸 구조이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Cold War) 시기입니다. 냉전이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직접적인 군사 충돌 없이 이념과 기술력으로 경쟁하던 대리전 구도를 말합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차별이 제도화되어 .. 2026. 6. 12. 영화 '이터널 선샤인' (비선형 서사, 기억 삭제, 사랑의 반복) 사랑이 끝난 뒤, 그 사람과의 기억을 통째로 지울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첫 이별 직후에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4년작 이터널 선샤인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기억을 지운다는 SF적 설정 위에, 사랑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얹은 작품입니다.비선형 서사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충격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도 당혹스러웠습니다. 발렌타인데이 아침에 몬탁행 기차를 타는 조엘, 해변에서 만난 소다색 머리의 클레멘타인, 얼어붙은 찰스강 위에서의 데이트. 그런데 갑자기 다음 장면에서는 조엘이 눈물을 흘리며 운전하고 있습니다. 잠깐, 이거 같은 영화 맞나요?이 혼란이 바로 감독의 의도입니다. 영화는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 .. 2026. 6. 11. 영화 '완벽한 타인' (영화분석, 비밀의삶, 블랙코미디) 솔직히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그냥 가벼운 코미디물이라 생각했습니다. 529만 관객이 선택한 영화라는 것도, 이탈리아 원작을 리메이크했다는 것도 크게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웃겼는데 찝찝했고, 통쾌했는데 멋쩍었습니다. 이 묘한 감각이 뭔지를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제한된 공간이 만들어낸 밀도이 영화의 배경은 거의 전부 석호와 예진의 집 안입니다. 세트장 하나에 배우 일곱 명을 가둬두고 두 시간을 끌어가는 구조입니다. 영화 용어로는 이를 단일공간 서사, 혹은 챔버 드라마(chamber drama)라고 부릅니다. 챔버 드라마란 극히 제한된 공간과 소수 인물만으로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서사 방식으로, 연극에서 출발한 개념입니다. 시각적 볼거리 없이.. 2026. 6. 10. 영화 '업' (칼과 엘리, 상상력, 모험) 픽사(Pixar)가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중 도입부 10분만으로 관객을 울린 작품은 아마 이 유일할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냥 아이들 보는 만화려니 했다가 그 10분이 끝날 때쯤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험인지 이 영화는 단 한 마디 대사 없이 보여줍니다.칼과 엘리,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세계칼은 어린 시절부터 탐험가 찰스 먼츠(Charles Muntz)를 동경하는 소년이었습니다. 찰스 먼츠는 남아메리카 오지를 최초로 탐험하고, 발견되지 않은 신비한 생명체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 했던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그를 우상으로 삼은 아이들에게 먼츠는 단순한 탐험가가 아니라 꿈 그 자체였습니다.그런 칼이 우연히 자신과 똑같은 모험의 열망을 가진 소녀 엘리를 만납니다. 둘은.. 2026. 6. 9. 영화 '코코' (죽은 자의 날, 당연함, 기억한다는 것) 꿈 앞에서 망설인 적이 있으신지요. 제가 처음 영화 '코코'를 봤을 때, 화면 속 미구엘이 기타 줄을 튕기던 그 순간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픽사(Pixar)가 2017년에 내놓은 이 애니메이션은, 죽은 자들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정작 이야기의 뿌리는 아주 살아있는 것에 닿아 있습니다. 바로 '당연하다고 믿어온 것들'에 대한 질문입니다.죽은 자의 날이 품은 것들멕시코의 국가 무형문화유산인 '디아 데 로스 무에르토스(Día de los Muertos)', 즉 죽은 자의 날은 매년 11월 1일과 2일에 걸쳐 열립니다. 여기서 디아 데 로스 무에르토스란 죽은 이들이 살아있는 가족의 곁으로 일 년에 단 한 번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멕시코의 전통 기념일로, 가톨릭의 만성절(萬.. 2026. 6. 8.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사랑결핍, 자기희생, 비극미학) 이 영화를 시청할지 말지 오랜 고민을 했습니다. '혐오스런'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버젓이 박혀 있는 영화를, 선뜻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심코 재생 버튼을 눌렀고, 그게 지금까지 세 번을 넘게 보게 된 시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이토록 붙잡는 것일까요?사랑결핍이 만든 한 여자의 초상마츠코의 이야기는 조카 쇼가 고모의 유품을 정리하러 가는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죽은 고모가 살던 아파트는 완전한 난장판이었고, 이웃들은 그녀를 '혐오스러운 마츠코'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쇼 역시 처음엔 그저 시시한 심부름을 하는 기분으로 고모의 흔적을 뒤지기 시작합니다.그런데 제가 이 도입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쇼의 시선이 곧 관객의 시선과 겹친다는 점이.. 2026. 6. 7. 이전 1 2 3 4 다음